처음에는 그들의 결정이 이해되지 않았다. '왜 이 좋은 교회를 떠나는 걸까?' 하는 의문과 함께 약간의 원망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한 교회가 토요일에 예배를 드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나의 호기심은 점점 커져갔다.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왜 토요일인가?"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고, 관련 서적들을 탐독했다. 놀랍게도, 연구하면 할수록 토요일 예배의 정당성을 깨닫게 되었다. 이는 단순히 다른 이들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나 스스로의 판단과 확신에 의한 결정이었다.
이 결정은 내 인생의 큰 분수령이 되었다. 재림교회인이 되면서, 나의 삶의 목표와 인생관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때까지 나는 문학을 공부하며 그 길을 걸어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점차 신앙이 깊어지면서, 성경 말씀을 연구하는 것이 내게 가장 큰 보람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은 나를 새로운 길로 인도했다. 목회자가 되거나 신학 교수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연구하고 가르치는 것이 내 인생의 사명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마침내 신학 공부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재림교회와의 만남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특별한 선물이었고, 내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꾼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를 통해 나는 진정한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명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인생의 굴곡은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지만, 돌이켜보면 나는 그 굴곡을 크게 느끼지 않고 살아왔다. 어쩌면 이는 내 성격 때문일지도 모른다. 내성적이면서도 모든 것을 포용하는 성격 덕분에, 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유지할 수 있었다.
우리 세대가 겪었던 가난은 지금 세대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다. 하루 세 끼를 제대로 먹지 못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많은 학생들이 빈 배를 안고 학교에 다녔다. 아침에 죽 한 그릇으로 하루를 버티고, 점심은 거르는 일이 다반사였다. 지금으로 치면 '결식 아동'이라 불렸을 그 시절의 우리들. 하지만 그때는 그것이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모두가 그렇게 살았기에, 우리는 그저 그런 삶을 받아들였다.
어떤 이들은 이런 환경에서 자라난 것을 큰 상처로 여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좋은 때가 오겠지"라는 희망을 항상 가슴에 품고 있었다. 이런 긍정적인 마음가짐은 아마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다. 어머니의 가르침과 내 성격이 합쳐져, 나는 인생을 비관하기보다는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객관적으로 볼 때 상처받을 만한 일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상처'라고 생각해 본 적이 거의 없다. 오히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라고 이해하며 넘어갔다.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앙심을 품는 일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특별히 '극복'해야 할 일도 없었고, 비교적 순탄하게 살아왔다고 느낀다.
내 삶을 돌아보면, 주변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이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특히 어린 시절, 나를 향한 선생님들의 사랑은 지금도 가슴 깊이 남아있다. 그 중에서도 초등학교 2학년 때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당시 나는 매일 아침 해가 뜨기 전 집을 나서 10리나 되는 길을 걸어 학교에 갔다. 아침에 죽 한 그릇 먹고 나면, 점심은 거르는 게 일상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그래도 도시락을 싸 왔지만, 나는 그럴 형편도 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담임 선생님께서 도시락을 두 개씩 싸오기 시작하셨다. 그리고는 나를 부르셔서 그 중 하나를 내게 주셨다. 달걀 프라이까지 얹어서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한 끼 식사였을 뿐이지만, 당시 나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값진 사랑의 표현이었다.
또 다른 선생님은 나를 집으로 심부름 보내셨는데, 그곳에서 본 광경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방 하나, 부엌 하나뿐인 작은 집. 그곳에서 선생님 내외분은 검소하게 살고 계셨다. 그때 비로소 나는 선생님들의 삶이 결코 풍족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같은 학생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나누는 모습에서, 진정한 사랑과 헌신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이런 경험들은 내 인생의 나침반이 되었다. 학창 시절뿐만 아니라 유학 시절에도, 한국인 선생님들과 외국인 교수님들로부터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았다. 때로는 내가 실수를 해도 너그럽게 용서해주시고, 항상 나의 가능성을 믿어주셨다.
이러한 경험들이 쌓이면서, 나 역시 다른 이들에게 그렇게 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제자들이 실수를 해도 "이럴 수밖에 없었겠구나"라고 이해하려 노력하게 되었고, 그들의 잠재력을 믿고 응원하게 되었다. 물론 평가의 기준을 무너뜨리지는 않되, 항상 이해와 용서의 자세를 갖추려 노력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이러한 태도는 더욱 자연스러워졌다. 젊었을 때는 야단치기 일쑤였지만, 나이가 들수록 그럴 일이 줄어들었다. 자녀를 키우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어릴 때는 엄하게 대했지만, 점차 너그러워지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물건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성경과 관련된 서적들이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는 단순한 수집품이 아닌, 내 삶의 여정과 신앙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보물들이다.
어린 시절, 우리 가정은 넉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언가를 모으는 것을 좋아했다. 처음에는 우표 수집으로 시작했지만, 미국에 가서도 그 취미를 이어갔다. 하지만 우표 수집은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어,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문득 든 생각이, 돈이 많이 들지 않으면서도 의미 있는 것을 모으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바로 성경 모으기였다. 지난 50여 년간, 나는 열정을 다해 성경을 모았다. 각국의 번역본, 고대 사본, 그리고 귀중한 역본들까지. 지금은 약 500권에 이르는 성경 컬렉션을 가지고 있다.
이 컬렉션에는 영어로 번역된 것만 해도 50종, 한국어로 된 것이 30종이나 된다. 해외 여행을 갈 때마다 그 나라의 성경을 사 왔다. 이 모든 성경들은 단순한 책이 아닌, 인류의 영적 여정을 담은 보물들이다.
처음부터 이 소중한 컬렉션을 삼육대학교 도서관이나 박물관에 기증할 생각으로 모았다. 지금 박물관 3층에 가면, 내가 평생 모은 500권의 성경이 잘 정리되어 전시되어 있다. 이것이야말로 내 진정한 재산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성경뿐만 아니라, 성경 관련 사전들도 열심히 모았다. 성경의 단어들을 해석한 사전들인데, 그 종류가 수십 가지나 된다. 어떤 것은 10권짜리도 있고, 2권이나 1권짜리도 있다. 이 사전들은 신학관 4층의 신학 도서실에 8000권이나 기증했다.
이렇게 모은 책들, 특히 성경은 단순한 수집품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내 신앙의 여정이자, 인생의 이정표와도 같다. 후세대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물질적인 것보다는 영적인 것에 가치를 두라는 것이다. 책을 통해 얻은 지식과 지혜는 그 어떤 재산보다도 값진 것이니까.
내 인생에서 만난 스승들을 떠올리면, 가슴 한편이 따뜻해진다. 중학교 3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 고등학교 3학년 때의 담임 선생님, 대학 시절의 교수님들, 그리고 유학 시절 만난 멘토들까지. 이분들은 모두 내 삶의 방향을 잡아주는 등대 역할을 해주셨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잊을 수 없는 다섯 분의 신학자들이 있다. 그들은 나의 학문적 여정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 중 한 분은 내 박사학위 논문 지도교수였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일 학자였는데, 그의 철저한 학문적 태도는 나에게 큰 가르침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 나는 특별히 한 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그분의 강의를 정식으로 들어본 적은 없지만, 단 한 번의 특강으로 내 인생에 깊은 인상을 남긴 분이다.
그날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나는 40대 초반의 젊은 학자였고, 그분은 이미 82세의 노학자였다. 400명이 가득 찬 강당에서, 나는 호기심에 차 맨 앞자리에 앉았다. 그분이 등장하자 강당은 숨죽였다. 걸음이 불편해 보이는 노학자가 칠판 앞에 섰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모두 압도당했다.
그분은 아무런 참고 자료 없이 7-8미터나 되는 칠판에 고대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의 모든 왕들의 이름과 재위 기간을 완벽하게 적어내려갔다. 수십 명의 왕들, 수백 년의 역사가 그의 손끝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그 모습에 우리는 모두 일어나 기립 박수를 보냈다. 적어도 30초, 어쩌면 1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의 박수는 멈추지 않았다.
그 날의 충격은 컸다. 나는 그분의 나이의 절반도 되지 않았지만, 그런 지식과 열정을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동시에 큰 영감을 받았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더욱 정확하고 깊이 있는 학문을 추구하게 되었다. 역사적 사실을 다룰 때는 특히 더 신중해졌다. 어설프게 대충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정확한 연도와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습관을 들였다.
이 경험은 나에게 좋은 스승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오랜 시간 가르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단 한 번의 만남으로도 제자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영향력, 그것이 진정한 스승의 모습이 아닐까.
지금 내 나이가 그때의 그분과 비슷해졌다. 나 역시 후학들에게 그런 영감을 줄 수 있는 학자가 되었는지 돌아보게 된다. 아직 그분의 그림자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그날의 감동을 기억하며 끊임없이 정진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닐까. 서로 알지 못하더라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영향을 주고받는 그런 관계 말이다.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는 조용하고 순응적인 학생이었다. 지금의 젊은이들이 보기에는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의 사회 분위기는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선생님의 말씀은 곧 법이나 다름없었고, 학생들은 그저 순응해야 했다.
나는 크리스천 가정에서 자라며 교회에 다녔기에, 타인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갖고자 노력했다. 선생님들의 엄격한 태도나 때로는 부당해 보이는 처사에 대해서도, 나는 그들을 이해하려 애썼다. "선생님도 나름의 이유가 있으실 거야"라고 스스로를 달래곤 했다.
그렇다고 해서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불만이나 의문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건 정말 억울해"라고 느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에겐 그런 불만을 표출할 용기도, 의지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맞아주기만 했던 것 같다.
이런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부정적인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면을 찾으려 노력하는 습관, 그리고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자세는 그때부터 형성된 것 같다. 물론, 지금의 젊은이들처럼 자신의 권리를 당당히 주장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동시에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은, 모든 상황에는 양면이 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부정적으로만 보였던 경험들이 지금 돌이켜보면 오히려 나를 성장시킨 소중한 교훈이 되었다. 젊은 세대들에게 말하고 싶다. 여러분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때로는 한 발 물러서서 상황을 바라보는 지혜도 필요하다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긍정적인 에너지를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인생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Image Prompt: **Title: "A Journey of Faith and Knowledge in Watercolor"** **Prompt:** Create a detailed watercolor painting that captures the essence of a Korean person's life journey through faith and education, set in South Korea. The scene should be filled with symbolic elements that reflect various stages and turning points in their life. Central to the image is a serene, traditional Korean village with a backdrop of lush green mountains and a clear blue sky. In the foreground, depict a young Korean man (around 20s) walking down a path lined with cherry blossom trees, representing the beginning of his spiritual journey. He holds a worn-out Bible in one hand and a stack of literature books in the other, symbolizing his initial faith and love for literature.